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재와 빨강


방역업체 약품 개발원인 남자는 본사가 있는 C국의 파견 직원으로 가게 된다.전날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던 남자는 출국 전 간단하게 짐을 챙겨 비행기에 올라 C국 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는 최근 폭발적인 확산을 보이는 전염병으로 인해 검역원이 있었고, 감기 기운이 있던 남자는 공항에 억류되어 검사를 받게 된다. 하루가 지나서 나온 검사 결과는 확진은 아니었지만 추후 지켜봐야 하는 단계라며 남자는 체류 예정지를 확인시켜주고 본사에서 마련해준 숙소가 있는 제4구에 가게 된다.온갖 쓰레기로 넘쳐나는 제4구에는 쓰레기에서 흐른 구정물과 역한 냄새가 가득했다.냄새를 뚫고 숙소인 아파트에 도착하자 전화가 걸려온다. 본사의 인사담당자인 몰이 당분간 출근하지 않아도 좋다며, 내부 회의를 거쳐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 결정될 거란 말을 한다.처음에는 자신이 쥐와 같은 처지라는 게 무서웠고 나중에는 쥐를 잡을 때에만 쥐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를 느끼게 되어, 그 안도감 때문에 틈나는 대로 쥐를 잡으려고 하는 게 무서웠다. 쥐 한마리가 이끈 우연의 행보가 두려웠고, 그 행보를 원망하듯 어떤 독한 약이나 험한 매질에도 죽지 않는 쥐를 끝끝내 죽이고 싶어 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p.228~229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인 남자가 언어도 잘 알지 못하는 C국의 파견 직원으로 가게 된 건 쥐 때문이었다. 지사장 앞에서 쥐를 단번에 때려잡았다는 이유로 남자는 본사에 갈 직원으로 결정된다. 파견 직원은 차기 지사장 선발에 유리할 거라는 점 때문에 남자는 회사에서 보란 듯이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외톨이가 된 남자는 쫓기듯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필이면 C국 공항에서부터 억류 사건이 있었고, 지독한 쓰레기 냄새로 가득한 숙소에서는 감염자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아파트 전체를 격리시켜 주민들을 통제한다. 이런 상황에 남자는 숙소에 들어왔을 때 문밖에 잠깐 놔둔 트렁크를 누가 훔쳐 간 바람에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새 출발을 하기 위해 도망치듯 모국을 떠났는데 안 좋은 일만 일어나 남자의 앞날이 어두우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핸드폰도 트렁크에 있었기에 남자는 숙소에 있는 전화로 모국으로 연락을 시도한다. 이혼한 전처의 바뀐 연락처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전처와 재혼했다가 최근에 이혼한, 자신의 학교 동창인 유진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나는 정보로 연락을 시도해 통화를 하게 된다. 남자가 그토록 연락하려고 했던 이유는 전처가 키우던 개를 모국의 집에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굳이 전처에게 연락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남자는 유진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집에 있는 개를 밖에다 버려달라는 부탁을 했다.유진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을 때, 이 개념 없는 남자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가 칼에 갈기갈기 찢겨 죽어있었고, 심지어는 전처마저 칼에 찔리고 폭행을 당해 얼굴이 뭉개져 있었다고 했다. 놀라 경찰에 신고한 유진은 조사를 받았다고 했고, 곧이어 C국에 있는 남자의 숙소에까지 누군가가 찾아와 그는 베란다에서 쓰레기 더미로 뛰어내린다.재난 상황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전처와 개의 죽음 이후 소설의 전개를 예상할 수 없었다. 쓰레기 더미로 뛰어내려 스스로 쓰레기 혹은 쥐가 된 남자는 부랑자가 되었고 나중엔 하수도에서 살아가는, 밑으로만 꺼져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전처와 개를 누가 죽인 건지는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소식을 듣고 칼을 쥐어본 남자는 묘한 익숙함을 느꼈고, 아직 이혼하기 전 전처와 외국 여행을 갔다가 일어난 사건을 회상함으로써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줬다. 남자는 극한의 상황에 놓였을 때 마음속에 있는 분노가 격하게 표출되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이 사실을 몰랐을 땐 남자의 상황이 안됐다고 여겨졌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이후에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쓰레기처럼 살았고 밑바닥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쥐 같은 사람이었다.소각이 막 끝나 검은 재와 잔불이 남은 쓰레기 더미에서 갓 쏟아져 나온 쓰레기를 뒤지고 있노라면 한마리 쥐가 된 느낌이었다. p.118쓰레기를 뒤지며 살던 남자의 상황이 변해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상황에서 이 남자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건 왠지 익명성에 기대 무슨 짓이든 저지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타국에서 자신을 증명할 그 어떤 서류도 없이 부랑자로 살아가다 쥐를 잘 잡는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어 어떤 장소든 갈 수 있게 됐고, 보호복 덕분에 자신이 누군지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약이긴 하지만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악플러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짧은 소설은 계속 놀라운 사건이나 과거가 드러나는데도 시종일관 덤덤하게 상황을 서술했다. 어쩐지 소설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문체를 유지했기 때문에 남자에게 그 어떤 동정이나 연민을 느낄 수 없었다.편혜영 작가님의 책을 세 번째로 읽는 건데 왠지 작가만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감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소설 속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
절대고독의 한 남자, 누가 그의 아내를 죽였을까
편혜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편혜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제약회사의 직원으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 파견근무를 가게 된 C국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쫓기다, 쥐를 잡는 임시방역원으로 일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에 밀도 높은 문장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다.

제약회사에서 약품개발원으로 근무하는 주인공은 파견근무를 발령받고 C국의 본사로 떠난다. 본국의 집에 가둬놓고 온 개가 생각나 동창생 유진에게 연락해 개를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유진이 주인공의 집에 가보니 난자당한 개와 칼에 찔려죽은 전처의 시신을 발견한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손바닥의 멍,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출국 전날밤의 기억, 유진과의 술자리 등 혼란스러운 생각에 휩싸여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해본바 집 근처 쓰레기장에서 자신의 지문이 묻은 칼이 발견되었고 자신이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작가는 살인용의자로 지목되어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현대사회의 인간성 상실과 절대고독을 나타낸다. 부랑 생활을 하며 쓰레깃더미를 뒤지고 위생은커녕 최소한의 인간적 삶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하수도에서 생활하는 등의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현대문명에서 일상의 사소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벌어지는 결과가 이토록 참혹한 몰락의 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저자는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인간성 상실, 소통의 부재로 빚어진 절대고독 등을 통해 현대문명의 이면을 치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1부
2부
3부

해설 - 차미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