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중에서-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공허에서 공허로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존재가 비존재를 향해무인 비행선이 하늘에서 지그재그로 추락하듯느리게 굴러 떨어지고 있다나는 감정에 충실했고나쁜 습관은 버렸고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어쩌면키 크고 잘생긴 회계사가 될 수도 있었다허나 어떤 악덕이 생을 여기까지 끌어내렸나- 전락 중에서-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꽃이 피고 지고눈이 쌓이고 녹는다그뿐이다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중에서-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청춘 중에서-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운명 앞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중에서요즘 소설이 잘 안 읽히는 참에여러 시인의 시를이것저것 찾아 읽어보고 있다. 심보선의 시집은 처음 읽어봤는데 마음에 드는 시가 많다. 1장, 3장의 시가 특히 좋다. 어김 없이 찾아오는 운명 같은 슬픔의 정서가 느껴진다. 한 줄 한 줄 곱씹어 읽어갈수록 공감이 된다.
1994년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며 등단한 심보선 시인이 데뷔 14년 만에 펼쳐 낸 첫 시집이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 땅에서 혹은 바다 건너 도시에서 쓰고 발표해 온 총 58편의 시를 담아내었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 아내와 연인에게서 멀어진 남자, 세상의 환멸과 우울한 미래를 흘낏 보아버린 ‘아이어른,’ 절대적 진리와 종교의 불확실성, 진실보다 더 진실다운 거짓, 뒤집힌 추억 속 새카만 추문으로 상처 입은 자, ‘노동과 여가를 오가는 성실한 인생의 주기’를 회의하고 포기한 자, 폭력과 자본을 숭배하는 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 해서 어쩔 수 없이 운명 앞에 ‘어색하게’ 고개 숙이는 자의 목소리의 지배 속에 담긴, 사소한 인간의 사랑과 지독한 이별 후의 시간에 대한 노래들이 중독성 있는 리듬을 타고 흘러 독자들의 가슴 한가운데까지 다다르고 있다.
제1부
슬픔의 진화
식후에 이별하다
오늘 나는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슬픔이 없는 십오 초
Rubber Soul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
피할 수 없는 길
풍경
장 보러 가는 길
아내의 마술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빵, 외투, 심장
착각
미망 Bus
전락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휴일의 평화
둘
제2부
노래가 아니었다면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너
어찌할 수 없는 소문
아이의 신화
먼지 혹은 폐허
배고픈 아비
나의 댄싱 퀸
여, 자로 끝나는 시
천 년 묵은 형이상학자
평범해지는 손
종교에 관하여
최후의 후식
한때 황금 전봇대의 生을 질투하였다
목가풍으로 깊어가는 밤
그것의 바깥
불어라 바람아
18세기 이후 자연과 나의 관계
제3부
청춘
삼십대
금빛 소매의 노래
이곳을 지날 때마다
즐거운 생일
세계는 맛있다
성장기
狂人行路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그때, 그날, 산책
대물림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도주로
멀어지는 집
실향(失鄕)
편지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그녀와의 마지막 테니스
떠다니는 말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해설 | 꿈과 피의 미술관·허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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